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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il in Woods

부부치료: 역류 상태의 부부들

역류 backdraft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 의미로 물이 거슬러 흐르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화재 현장에서 사용될 때는 문이 닫힌 밀폐된 공간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연소가 진행되어 산소가 희박해지고,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문이 열려 외부 공기가 유입되면 불길이 폭발적으로 번지는 현상을 말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불이 나면 제일 먼저 불이 타는 데 필요한 산소부터 소모하게 되고, 산소가 부족해지면 불꽃은 없고 연기만 나면서 타들어 가는 불완전 연소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때 외부에서 산소가 유입되면 순간적으로 폭발하듯이 불길이 확 번지게 된다.


역류 직전 상태에 있는 것 같은 부부들을 외래에서 자주 본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속에는 머리끝까지 분노로 가득 차 조금만 건드려도 뚜껑이 열릴 것 같은 사람들이다. 오랜 시간 가부장적 남편과 함께 살면서 묵묵히 애들을 키우며 버텨 온 50~60대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경제적으로 남편에 의존하다 보니 참고 또 참고, 그래서 어느덧 가슴속에 산소가 거의 없어져 버렸지만 어떤 계기로 산소만 공급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런 부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부부 간의 대화 방식에 문제를 보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기와 듣기에 문제가 있다.


말하기와 듣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좋은 수단도 되지만, 동시에 상대의 가슴을 찌르는 흉기가 되기도 한다. 듣기보다는 말하기가 그런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부부는 어떤 인간관계보다 심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말로 인한 공격은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할 때는 별로 상처가 되지 않는 말도 배우자가 하면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흐르게 된다.


어떤 말이 배우자에게 상처를 주는가? 사람들은 말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말하기에서는 말의 내용 what보다 말하는 방식 how이 훨씬 더 중요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비난하고, 방어하고, 경멸하는 말투다. 이런 말투는 상대의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말하기보다는 덜하지만, 듣기도 아주 중요하다. 공감까지는 못하더라도 상대방이 말하면 일단 경청하고, 그중에 작은 부분 하나쯤은 수긍해 줘야 한다.


역류 상태의 부부는 불완전 연소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외부의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불길이 타오른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자식이 애를 먹이거나, 시댁이나 친정에 문제가 생기는 등의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역류 상태의 부부들에게는 엄청난 산소를 공급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관계가 건강한 부부들은 어려움이 닥칠수록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극복해 나감으로써 그 관계가 더 굳건해지지만, 역류 상태에 있는 부부들은 서로를 더 비난하고, 더 방어적으로 대하고, 더 경멸하면서 결국에는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애들 클 때까지만 참자고 무수히 다짐했지요."

"헤어지더라도 최대한 많은 고통을 주고 헤어지고 싶어요."

"저 인간 때문에 내 인생은 처음부터 꼬였어요."


황혼 이혼을 부추기는 변호사들 역시 엄청난 산소를 공급한다.


"뜯어낼 수 있는 대로 다 뜯어내겠습니다. 저희만 믿으세요."


주위 친구들과 자녀들도 충분한 산소를 공급한다.


"혼자 사는 게 훨씬 편해. 뭐 하러 지금까지 수발하고 살아."

"어머니가 그토록 고통스럽다면 저희는 이혼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다. 배우자가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혼하지 않고 각자 살아가길 권한다. 나이 들면 가부장적 남편도 대부분 수그러들어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황혼 이혼은 과거 행동에 대한 현재의 복수일 뿐이다. 복수한다고 가슴이 후련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가슴속에 없어진 산소는 다른 방법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늦었지만 부부가 함께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말하기와 듣기는 몸을 덮고 있는 피부와 같아서 스스로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배우자의 사소한 행동에도 끊임없이 고마워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태도를 몸에 익히는 것이 제일 좋은 해결책이다.


수십 년 동안 함께 살다 보면 부부 관계도 노후화되어 리모델링이 필요하다. 녹이 슬고 부식된 다리는 녹을 긁어 내고 페인트를 새로 칠해 수리하듯이, 오래된 부부 관계도 새로운 관계로 수리해야 한다. 부부 관계에서는 다이아몬드 반지 한 개보다는 풀잎 반지 백 개가 훨씬 낫다. 매일 풀잎 반지 하나를 만들어 손에 끼워 준다는 생각으로 배우자를 대한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부부 관계 전문가도 아니면서 감히 주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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