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당신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 김철권 정신건강의학과

- May 31
- 3 min read
Updated: Jun 17
성폭행을 당한 20대 여자가 내 앞에서 흐느껴 울고 있다. 왼쪽 손목에는 칼로 그은 자해 흔적이 선명하다. 함께 온 부모는 기가 차는지 외래 진료실 창밖을 내다본다. 아버지는 조금 있다가 진료실을 나가버리고 어머니도 곧 따라 나가버린다. 진료실에는 그녀와 나만 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해바라기 센터에서 필요한 의료적 법적 조치는 다 취해졌기에 나는 정신과적 도움만 주면 된다. 그녀가 울음을 그친 후에 이야기를 들어본다. 자책감과 자기 모멸감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무얼 해야 하나?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매번 어려움을 느낀다.
성폭력 전문치료센터인 해바라기 센터 소장을 맡은 후로 성폭행당한 여성을 자주 접하게 된다. 엄청난 외상을 경험했기에 피해자들 대부분은 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 증세를 보인다.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남자와 옷깃만 스쳐도 깜짝깜짝 놀라고, 성폭행당한 장소를 피하게 되고, 엘리베이터에서 남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공황발작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 폭풍우가 지나고 난 후에도 대부분은 분노, 수치심, 불안, 우울, 죄책감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한다. 그중에서도 죄책감은 자기 학대와 자기 모멸감으로 이어져 피해자에게 치명적인 심리적 손상을 초래한다.
왜 죄책감인가? 죄책감이란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인데 성폭력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주위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 때문이다. 사람들은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할 만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런 짓을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인가 유혹할 만한 암시를 주었거나 유혹적인 옷을 입었거나 유혹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가당찮은 말이다. 설혹 여자가 남자를 유혹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남자가 여자를 성폭행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때로는 가족조차 화를 주체하지 못해 피해자를 비난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가족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
피해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그렇게 된 데는 제 잘못이 큽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했어야 했는데.”
“조심하면 성폭행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묻는다.
“그래도 위험성은 줄어들겠죠.”
“우리가 택시를 탈 때 이 택시가 곧 사고를 낼 택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알 수 없죠.”
“마찬가지로 당신이 어떤 남자를 만날 때 그 남자가 당신을 성폭행할 거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어떤 남자가 당신을 성폭행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옷을 입었건, 어떤 장소에서 만났건, 어떤 행동이나 말을 했건, 술을 마셨거나 마시지 않았건 그것과는 무관합니다. 성폭행 여부는 전적으로 그 남자의 생각에 달려있습니다. 성폭행은 남자의 범죄 행위이지 여자의 유혹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당신의 잘못은 1%도 없습니다. 당신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피해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할 때 자신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피해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 목숨 걸고 저항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가장 후회돼요.”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내가 묻는다.
“왜요? 제가 못 할 말이라도 했습니까?”
“성폭행을 당할 때 격렬하게 저항하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아주 위험합니다.”
“그럼 성폭행당할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상대방을 힘으로 제압할 수 없을 때는 저항하기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덜 위험합니다. 크게 다치거나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성폭행을 당할 때 목숨 걸고 저항한다고 해서 그것을 피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 게 비겁한 행동이 아니고 오히려 현명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당신은 아주 현명하게 처신한 겁니다.”
피해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하는 동안 자신의 몸이 성적으로 반응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분명 자신이 원치 않았는데도 성폭행을 당하는 동안 자신의 몸이 흥분되는 반응을 보이고 그래서 피해자는 나중에 자신이 강간당한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워한다. 가해자가 이 점을 노리고 강하게 반박하면 피해자는 더더욱 자신 없어 한다.
“저 자신을 못 믿겠어요. 틀림없이 당했는데 그때 제 몸이 흥분한 것 같거든요. 제가 성행위를 좋아하는 끼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성폭행 당한 여자가 말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아는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자들 중 일부는 ‘성폭행을 당할 때 내 몸이 흥분해서 그 남자를 받아들였으니 어쩜 성폭행이 아닌지 몰라. 무의식적으로 내가 그를 원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내가 정말로 그 사람을 원하지 않았다면 내 몸이 그런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성폭행범은 법정에서 변호사를 앞세워 ‘그때 저 여자도 즐겼어요. 신음 소리를 내고 흥분하면서 나와의 섹스를 즐겼어요. 그 점은 확실해요’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셔야 할 점은 성폭행당할 때 피해 여성이 보이는 몸의 반응은 일종의 자극에 대한 반사작용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 자극에 대해 몸이 자동적으로 보이는 반응입니다. 마치 방광에 물이 차면 소변을 보고 싶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피해 여성이 보이는 몸의 반응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원치 않는 성관계라고 생각하여도 몸은 그것과 상관없이 반응합니다. 살아있는 몸은 모두 그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당신의 몸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성폭행을 당한 20대 여자가 울음을 그치자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당신이 자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런 일을 당하면 누구나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잘못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범죄행위를 당신에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길 가다가 강도를 만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 피해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학대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고 쓰다듬어주어야 합니다.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까지 제가 옆에서 도울 테니 같이 노력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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