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취생몽사주酒
- 김철권 정신건강의학과

- Jun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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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Jun 17
왕가위 감독의 아름다운 영화 <동사서독>에서 황약사 역을 맡은 양가휘는 말한다.
“얼마 전에 어떤 여자가 술 한 병을 주었는데 술 이름이 취생몽사야.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다고 하더군. 난 그런 술이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어.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 때문이란 말도 하더군. 잊을 수만 있다면 매일매일이 새로울 거라 했어.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 자네 주려고 가져온 술이지만 나눠 마셔야 할 것 같군.”
취생몽사주를 마신 황약사는 그날 이후로 많은 일을 잊었다.
오늘도 외래에 온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취생몽사주를 주문한다. 삶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서다.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장면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괴로워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환자들은 이렇게 호소한다.
“제발, 잊게 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더 이상 생각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기억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습니다. 기억을 없애는 약 좀 주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들도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다. 자녀를 먼저 잃은 부모들은 기억 때문에 삶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한 고통을 느낀다.
“아이에 대한 생각이 나면 가슴 통증이 너무 심해 숨을 쉴 수가 없어요. 기억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지난 일이 떠오릅니다. 기억을 지우는 약은 없나요?”
<쇼생크 탈출>에서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기나긴 세월 동안 옥살이를 하는 주인공 앤디가 교도소 친구인 레드에게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앤디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지후아타네호예요. 멕시코에 있어요. 태평양에 접한 작은 마을이죠. 멕시코인은 태평양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기억이 없는 곳. 내가 가고 싶은 곳은 기억이 없는 따뜻한 곳이에요.”
평생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가진 앤디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곳은 기억이 없는 곳, 기억이 중단된 곳이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인간은 사건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오직 기억 때문에 괴로워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증상은 기억의 상징이다. 기억이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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