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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il in Woods

전환장애: 특효약

Updated: Jun 17, 2025

한 50대 여성이 두 팔이 마비되는 증상을 보여 입원했다. 응급실에서 여러 검사를 시행하였지만 특별한 이상소견이 없어 정신과로 입원했다. 입원 첫날 회진하면서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증상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팔이 마비되었는데 걱정이 되지 않습니까?” 내가 묻자 그녀는 남 이야기하듯이 “곧 좋아지겠죠”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녀의 정신과적 병명은 ‘전환 장애’이다. 심리적 갈등이 육체적 마비 증상으로 나타나는 병이다. 주로 손발이 마비되고 때로는 앞을 보지 못하거나 말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신체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많이 괴롭다는 의미다.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길이 없으니 몸으로 말하는 것이다. 몸이 아프니 마음은 온통 신체 증상에 쏠리게 되고 그만큼 마음의 갈등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시는 일이 뭡니까?” 내가 물었다. 

  “도넛 가게를 합니다.” 

  “혼자서 하는가요?” 

  “아니에요. 남편과 둘이서 합니다. 남편은 만들고 저는 팔고. 늘 함께하지요. 1년 365일 일해요.” 

  “피곤하겠습니다. 쉬는 요일은 없는가요?” 

  “하루라도 쉬려고 하면 애들 학비가 생각나 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많이 괴로워요. 남편은 자주 친구를 만나러 가지만 남편이 나가고 나면 누군가 가게를 지켜야 해서 저는 하루도 쉬지 못해요.” 

  “팔이 마비된 것이 이번이 처음인가요?” 

  “아니에요. 벌써 네 번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일이 생깁니까? 예를 들면, 혼자 있을 때나 아니면 피곤할 때나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나. 혹시 남편이 없을 때 그런 일이 생기는가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녀가 말꼬리를 흐린다. 

  “네 번 모두 남편이 없을 때 그런 일이 생겼나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우연이겠지요.”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한다.


  인간의 마음에서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은 필연이다. 네 번 모두 남편이 없을 때 팔이 마비되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남편의 부재와 연관이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도넛 가게에서 팔이 마비된다는 것은 장사하기 싫다는 의미다. 전형적인 상징이다. 그녀의 마음 밑바닥에는 남편에 대한 분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이 증상 발생의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것은 반대로 남편이 그녀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 상태를 좀 더 파악하기 위해 회진하면서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내주었다. 


  ​첫째, 내가 남편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둘째, 내가 가장 화가 날 때는? 

  셋째, 내가 가장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는? 

  넷째, 내가 지금 가장 힘든 것은? 

  다섯째, 내가 지금 남편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똑같은 문제를 ‘남편’ 대신 ‘아내’라는 단어로 바꿔 남편에게도 과제를 내어주었다. 두 사람이 적은 것을 놓고 대화를 나누면 서로 공감은 못 해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입원해 있는 아내는 각각의 질문에 대해 많은 내용을 적어 왔다. 할 말이 많다는 것이다. 반면 남편은 각 질문에 대해 짤막하게 적어 왔다. 자신이나 아내의 마음에 대해, 자신과 아내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의미가 있다. 나는 먼저 아내와 남편이 적은 것을 서로 바꾸어 읽게 했다. 그리고 한 문제마다 상대방이 적은 내용을 읽고 느낀 점에 대해 말하게 했다. 

  말하는 쪽은 주로 아내였다. 남편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렇지만 남편의 얼굴은 ‘아, 내가 지금까지 그것을 몰랐구나!’ 하는듯한 표정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토록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어요.” 대화가 끝난 후 아내는 흡족해했다. 그리고 그녀가 보였던 마비 증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말 치료talking cure. 말하는 것이 곧 치료라는 진리를 다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퇴원하는 날,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분이 아내를 치료한 것입니다. 치료자는 남편입니다. 고맙습니다.” ​

  내 말에 남편이 쑥스러워했다.


  부부 관계에서 치료제는 따로 없다. 배우자의 말을 들어 주는 것, 그 자체가 특효약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 위로의 말 한마디가 특효약이다. ​말 자체가 치료 효과를 가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 말은 생각할수록 놀라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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