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치료: 동요 부르는 남자
- 김철권 정신건강의학과

- Jun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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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Jun 17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남자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하시지요. 지금처럼 약을 하루 두 번 두 알씩 드시든지, 아니면 제 처방대로 하고 약은 자기 전에 한 번만 드시던지. 저야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까 궁리하다 보니 그런 처방을 하게 되었습니다만...... 결정은 본인이 하는 거니까요”
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선택을 하라는 신호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그가 신음하듯이 내뱉었다.
“그렇게 해 보지요. 쪽팔리지만.” 그런 대화가 오간 것이 한 달 전이었다. 오늘 그가 부인과 함께 외래를 방문했다.
수개월 전에 한 50대 남자가 부인과 함께 외래를 방문했다. 무엇 때문에 왔는지 묻자 남자는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부인이 대신 말했다.
‘남편이 욕을 한다. 별일이 아닌데도 집에만 오면 자꾸 화를 내고 욕을 한다. 결혼한 이후로 늘 그랬다. 밖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집에만 오면 그런다.’
결혼 후부터 지속되던 문제인데 왜 지금 정신과를 방문했느냐고 묻자 부인이 다시 대답한다. 결혼 초에는 남편이 하는 욕에 충격을 받아 이혼까지 생각하였지만, 욕하는 것 말고는 별문제가 없는 데다가 결혼 후 30여 년 살다 보니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갱년기가 와서 그런지 남편이 욕을 하면 도무지 참고 견딜 수가 없다. 특히 ‘씨팔X’이라고 할 때는 남편을 때려죽이고 싶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지랄하네’라는 말도 듣기가 너무 싫다. 그래서 남편을 설득해서 왔다.
내가 그 남자에게 지금까지 부인이 한 말이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왜 집에만 오면 짜증을 내고 부인에게 욕을 할까? 부인은 누구의 대체 인물일까? 몇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당장은 욕하는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우울증 치료제와 충동 억제제를 처방하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다행히 약의 효과가 좋아서인지 환자가 집에서 욕하는 빈도는 많이 줄어들었다. 환자와 부인 모두 만족하였다.
그런데 오늘 환자가 약의 용량을 줄여달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하루 두 번 아침 저녁으로 두 알씩 복용하는데 하루 한 번만 복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상태가 호전되었으니 환자의 요청은 정당했고 나 역시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나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순간적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것을 이 남자에게 실험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내가 그 남자에게 말했다.
“몇 개월 전에 저를 처음 찾아온 이유는 부인에게 자주 욕을 하고 자꾸만 화를 내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약물치료로 그 증상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믿고 있는 신념이 하나 있습니다.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은 결코 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쁜 말과 욕은 양립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제가 오늘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집에서 매주 한 번 동요를 부르면 복용하는 약을 줄여 드리겠습니다. 어떤 동요라도 좋습니다. 매주 한 번 집에서 부인 앞에서 동요를 부르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저의 제안이?”
결국 그 남자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내의 강요가 결정적으로 작용했지만, 압력에 가까운 나의 설득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그 환자는 계약을 맺고 부인을 증인으로 세워 계약서에 서명하였다. 계약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매주 한 번 나는 집에서 동요를 한 곡 부른다.
2. 동요는 내가 선택한다.
3. 아내는 내가 매주 한 번 동요를 불렀는지 확인한다.
4. 내가 이 약속을 이행하면 담당 의사는 약 용량을 줄인다.
5. 이 모든 것은 나와 담당 의사와의 자유의지로 결정한 사항이다.
위의 사항은 0000년 0월 00일부터 시행한다.
나: 000 서명
담당 의사: 김철권 서명
아내: 000 서명
오늘 부인은 지난 한 달 동안 환자가 매주 집에서 동요를 불렀다고 했다. 동요 제목은 <동구 밖 과수원 길>이라고 하였다. 나는 계약서에 적힌 대로 환자의 약을 하루 한 번 자기 전에 두 알 먹는 것으로 줄여주었다.
나는 정신분석의 가치를 믿는다. 그렇더라도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는 행동치료의 가치도 굳게 믿는다. 내가 그 남자에게 말했다.
“노래하는 동안에는 욕을 할 수가 없지요. 입이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더구나 동요를 부르는 동안에는 더더욱 나쁜 생각을 할 수가 없지요. 언어가 생각을 지배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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