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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il in Woods

조현병: 가슴 벅찬 순간

Updated: Jun 17

임상 의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학술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병원 보직을 맡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환자가 회복되는 것이 가장 영예로운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스물한 살의 그녀를 보았을 때 첫인상은 그녀 어머니가 가져온 진료 의뢰서에 의해 이미 결정돼 버렸다. 서울 모 대학병원에서 발급한 진료 의뢰서에는 ‘난치성 조현병, 15세 발병, 여러 가지 치료를 했으나 호전 없음. 어머니가 원하여 교수님에게 의뢰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소를 띠면서 그녀를 반겼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의뢰하는 쪽에서는 치료해도 나아지지 않으니 답답했을 것이고 그래서 의뢰서를 써 주었겠지만, 그런 환자를 맞는 나로서는 일반 환자보다 힘은 더 들고 보람은 적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러 가지 약을 칵테일처럼 섞어 사용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환자는 여전히 환청과 망상에 시달렸고 수시로 혼자서 낄낄거렸다. 정성이 지극한 환자 어머니에게 솔직히 자신이 없다고 고백하자 꼭 1년만 치료해 달라고 나에게 매달렸다. 집이 서울이라 부산 내려오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매주 한 번씩 애를 데리고 내려오겠다고 한다. 나 역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다 보니 그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기존 방식으로는 어려우니 내 스타일대로 한번 치료해 보자. 어차피 약만 가지고는 안 되니 증상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보자.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도해보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그때부터 매주 환자에게 증상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갈대와 바람의 관계를 설명하고 그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갈대는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꺾이지 않고 단지 옆으로 누울 뿐이란다. 마찬가지로 너를 괴롭히는 증상도 너를 무너뜨리지는 못하고 불편하게 만들 뿐이야. 소리가 심하게 들리면 ‘오늘따라 시끄럽네.’라고 대수롭잖게 받아들이거라. 또 누가 너를 해칠 거라는 생각이 들면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부네’라고 생각하면서 흔들리는 갈대를 떠올리거라. 갈대가 꺾일 것 같은 공포심이 들면 그때는 나에게 전화해라. 그러면 내가 항상 너를 지켜 줄 테니까 아무 걱정 말거라. 내가 바람을 막는 크고 강한 벽이 되어주마. 대신 네가 꼭 지켜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단다. 그것을 지키겠다고 나에게 약속해다오. 매일 한 시간씩 걷고, 매일 목욕하고, 매일 깨끗한 옷을 입는 거란다. 스물한 살은 보기만 해도 눈부신 나이란다.”


  초등학생 가르치듯이 과제를 내주고, 칭찬하고, 또 칭찬하고, 또 칭찬하고. 그러기를 어느덧 1년이 지나갔다. 예쁜 아가씨는(나는 그녀를 그렇게 부른다) 이전에 비해 증상은 아주 조금 좋아졌지만 사회기능 면에서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호전되었다. 옆에서 보는 어머니가 놀랄 정도였다. 처음엔 온몸에서 퀴퀴한 냄새를 풍기던 환자가 이제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원피스 차림에 몸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는 예쁜 아가씨로 변해 있었다. 어머니는 아주 만족해했고 외래 오는 빈도도 매주 1회에서 매달 1회로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료가 끝난 후 그녀가 수줍어하면서 나에게 선물을 건넨다. 풀어 보니 넥타이다. 

  “교수님이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평소 넥타이를 매시지 않으니. 짙푸른 색을 골랐어요. 제가 좋아하는 깊은 바다색이에요.” 

  그녀로부터 선물을 받는데 그냥 눈물이 핑 돌았다.  

  ​“교수님 선물을 사 드린다고 매일 한 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동안 쫓겨난 편의점이 아마 수십 군데는 더 넘을 거예요. 아르바이트하는 사람들이 잠시 자리 비운 틈을 대신 봐주었으니 아르바이트의 아르바이트인 셈이죠. 저도 아직까지 선물을 못 받아봤는데, 교수님이 샘나네요.” 옆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흐뭇한 얼굴로 한마디 거든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도 왠지 말이 나오질 않는다. 그런 나를 보고 그녀가 한마디 더 한다. 

  “교수님, 사랑해요. 저보고 예쁘다고, 잘한다고 말해 준 사람은 어머니 말고 교수님이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그녀와 어머니가 나가고 나는 잠시 고인 눈물을 닦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의사는 이런 맛에 하는 거야. 삶에는 이런 가슴 벅찬 순간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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