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무지개 치료
Updated: Jun 17, 2025
조현병을 앓고 있는 35세 남자 환자가 있다. 20대 초반에 발병했으니 10년도 지난 만성 환자다. 그 환자가 웃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먼저 말을 걸어온 적도 없다. 외래로 오면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약 처방을 받고는 꾸벅 인사만 하고 나가버린다. 그 환자를 보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초기에는 진료 기록지에 환청(-), 망상(-), 정동둔마(+), 사고 빈곤(+), 시선 접촉(+), 무의욕(+), 무쾌감(+), 무사회성(+) 등이 나열되어 있었고 구체적으로 환자가 보이는 행동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특별한 변화 없음’이라는 말 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초기에는 아마도 환자가 보이는 음성증상을 파악하기 위해 그렇게 적어놓은 것 같았다.
외래 환자가 많을 때 그 환자가 오면 나는 내심 반가웠다. “잘 지내죠?”라고 한마디 묻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이전 처방을 그대로 내면 되니까 말이다. 한마디 불평도 안 하고 매달 한 번씩 꼬박꼬박 찾아오는 그 환자가 나에게는 무척 편했다.
어느 봄날, 그 환자는 여전히 진료를 받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잘 지내느냐고 한마디 묻고는 진료 기록지에 ‘특별한 변화 없음’이라는 말과 함께 28일치 처방을 적은 후 나는 다음 환자 진료 기록지를 펼쳤다. 이제 그만 나가달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시간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그 환자가 일어나지를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요?”
내가 물었지만 그 환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불과 30초가 지났지만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해 내가 약간 감정 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어요?”
그 환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기다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 버릴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건 너무 못된 행동 같아 꾹 참고 있었다.
외래 창가로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그 환자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앉아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실제로는 3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환자가 정적을 깼다.
“외롭습니다, 선생님.”
순간 나는 당황스러웠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환자가 한마디 더 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진료를 마치고 나는 왜 그때 당황했는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가장 큰 이유는 그 환자를 음성증상의 틀 속에 매몰시켜 놓은 채 습관적으로 대해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환자는 음성증상이 심한 환자이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거야, 음성증상만 호전된다면 좋아질 거야, 그러나 모든 약을 사용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는데 어떻게 음성증상을 호전시킨다는 말이지? 증상과는 별개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4주 후 그 환자가 다시 찾아왔을 때 나는 기본적인 대화기술부터 가르치기로 했다. 말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할 말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하나하나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종의 맞춤형 개인 교습인 셈이다.
수년 동안 매번 1분도 안 되는 진료를 한 죄책감이 내 무의식 속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1년간 한 달에 한번 숙제까지 내어주는 개인 교습을 하자 그 환자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썰렁한 개그를 하면서 혼자 웃기도 하고 말의 양이나 횟수, 적극성이 현저히 증가하였다.
환자와의 대화 양이 증가할수록 나는 마음이 아파왔다. 그동안의 환자 삶이 컬러가 아닌 흑백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밥 먹고 약 먹고 자고 또 밥 먹고 약 먹고 자고, 그 환자의 하루 일과는 그렇게 세 박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A4 용지에 1시간 간격으로 시간을 적은 일일 활동표를 주면서 밥 먹고 약 먹고 자는 것은 까만색으로 칠하고 나머지 활동은 다른 색으로 표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계속 개인 교습을 진행해 나갔다.
처음에는 온통 시꺼먼 색뿐이었던 A4 용지에 어느 날부터 빨강 파랑 노랑 색들이 하나씩 칠해지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면 빨간색을 칠하고, 하루 30분 걸으면 파란색을 칠하고, 또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노란색을 칠하고...
나는 A4 용지가 무지개와 같이 여러 가지 색으로 변해가는 그 찬란한 과정을 환자와 함께 즐겼다.
좋은 논문을 쓰는 것도 중요하고 이름이 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삶을 흑백에서 무지개와 같은 형형색색의 컬러로 만드는 것, 환자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우는 것, 그것이 정신과 의사가 해야 할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때로는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을 갈구하며 이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때로는 환멸을 느껴 결코 이 세상을 가슴속에 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지만, 그래도 내가 있어야 할 장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진료실에서 삶에 대해 배우는 것은 환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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